이강년 (185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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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강년은 1858년 경상도 문경에서 태어난 조선 후기의 무신이자 의병장이다. 1880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지냈으나 갑신정변 이후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동학 농민 운동, 을미사변, 을사늑약, 고종 강제 퇴위 등 격변하는 시국 속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 1907년 13도 창의군에 가담하여 가평, 인제 등지에서 연승을 거두었으나, 1908년 금수산 전투에서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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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년 (1858년) | |
---|---|
기본 정보 | |
![]() | |
본관 | 해주 최씨 |
자(字) | 낙천(樂天) |
호(號) | 운강(雲 Kang) |
생애 | |
출생 | 1858년 |
사망 | 1908년 |
주요 활동 | 을미사변 이후 의병 활동 참여 |
최후 | 체포 후 교수형 |
묘소 | 충청북도 제천시 금성면 성내리 |
가족 | |
아버지 | 최흥원(崔興元) |
어머니 | 숙부인 안동 김씨 |
부인 | 정부인 안동 권씨 |
아들 | 최진규(崔鎭奎) 최학규(崔學奎) 최승규(崔升奎) 최흥규(崔興奎) |
딸 | 4명 |
기타 정보 | |
훈장 | 건국훈장 대통령장 (1962년 추서) |
2. 생애
이강년은 경상도 문경군 가은면에서 아버지 이기태(李起台)와 어머니 의령 남씨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조선 3대 왕 태종의 둘째아들인 효령대군 이보(李補)의 18대손이며 유인석의 문인(門人)이다.
1880년(조선 고종)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종 6품 행용양위부사과에 올라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나 1884년 갑신정변 때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갔다.
2. 1. 관직 활동
2. 2. 의병 활동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때 문경 동학군의 지휘관으로 일본군, 탐관오리와 싸웠으며,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의병을 일으켜 제천에서 류인석의 의병과 합류하여 유격장이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맺어지고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자 영춘(永春)에서 의병을 일으켜 원주의 민긍호와 합세, 충주를 공격했다.1907년 12월 전국의 의병들이 서울을 공격할 때 13도 창의군에 가담했고, 그 후 가평, 인제, 강릉, 양양, 용소동, 갈기동, 백담사 등지에서 연승을 거두었다.
2. 3. 최후
단양 금수산 전투에서 발목에 총탄을 맞아 걷지 못해 체포되어 1908년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향년 49세).3.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2] 그의 항일 이력으로 인해 가족들은 고향을 떠나 살게 되었으며, 이 틈을 이용하여 일본인 3명과 일경으로 종사했던 한국인 1명이 이강년 소유의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 일대 토지 3,000여 평을 강탈해갔다.[2] 그의 가족이 숨어 지내는 사이 문경 총독이라는 경찰과 한국인 경찰 이모 씨가 그의 아들을 총칼로 협박해 '매도'한 것처럼 강제로 도장을 찍게 했다.[2] 이는 일제강점기 친일파들이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재산을 불법적으로 강탈한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로, 역사적 진실 규명과 피해 회복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4. 가족
이강년의 조부는 이덕의(李德義)이고, 부친은 이기태(李起台)이다. 슬하에 이승재(李承宰), 이긍재(李兢宰), 이명재(李明宰)를 두었다.
참조
[1]
뉴스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절규 "빼앗긴 재산 돌려줘야 진정한 광복"
http://weekly.hankoo[...]
주간한국
[2]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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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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